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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합격후기/국민대 합격후기

부산미대편입 명문 -국민대 회화과 편입 합격생 후기

by 후소편입미술학원 2023. 4. 14.

 

 

            부산미대편입 명문은 양정에 있습니다.

        이*진 -  국민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회화전공 합격,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서양화 전공 합격, 
                    ( 인제대 인문학부 2학년 재학중 일반편입)

 

 

고등학교 시절, 대입시험을 치면서도 나는 별다른 꿈이 없었다. 사실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에 자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을 만큼 조숙했고, 중학교 때는 확고한 꿈을

가졌다. 단순한 이유로 굳히게 된 ‘기자’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청소년 기자단’같은 활동들을 하면서

작지만 다양한 활동들을 해 보고자 노력했다. 기자가 되려면 문과를 가야 한다는 생각에 문과를 가게

되었고, 한국의 단순 암기식 입시제도에 흥미를 붙이지 못한 터에, 책을 읽는 것은 삶의 큰 즐거움이었

다. 그렇게 문학은 조심스럽게 내 삶에 흡수되었다. 그렇지만 입시를 실패하고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

던 터에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특별한 목표 없이 시작한 재수는 곧 실패로 이

어졌고, 재수를 하면서 가장 극단적인 우울을 맛보았다. 내가 사랑하던 문학은 나를 허무주의자로 몰

아세울 뿐이었다. 그 시간들을 탈피하고자 대학을 가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회

의감으로 꿈을 잃었던 때였다. 세상 사람들의 무지를 악용하는 TV, 신문매체들에 신물이 났다.

대학을 와서 내가 좋아하는 문학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책을 읽는 것은 내 일생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지만 이것으로 큰 자유를 느낄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대학1학년때, 나는 무엇인가 답답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은 ‘패러글라이딩’이라는 동아리

를 통해 승화되는가 싶었다. 하늘을 날 때의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순한 취미,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때의 나의 열정은 산을 옮길 수 있을 만큼 컸지만 현실 속

에서 그것을 적용할 만한 것이 없었다. 큰 세계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해외봉사활동’을 하는

단체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단체에 가입을 하고 열심히 활동을 하면서 부산지역의 운영진을 맡게 되

었다. 그러면서 서울에서는 대학 안에 이런 동아리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들의 자유분방한 대학생활이 나에게 강하게 각인되었다.

그렇게 몇일을 앓았다. 나는 뭔가를 해야만 했다. 이 상태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편입’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대학을 오면서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벅찬 일로만 느껴졌었다. 그렇지만 나

는 또 한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리고는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다. 이번에 선택하는 길은 마지막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의 선택에서 후회하지 않을 만한 것은‘예술’뿐이었다. 그것은 말만 들어도 가

슴이 벅차오를 만큼 가슴 뛰는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아주 먼 곳의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고, 만들고, 오리고 붙이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심심하면 그림책을 만들었고,

작곡과 작사를 하곤 했으며 책상에 커다랗게 만화주인공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고등학교 때 충

격 속에 휩싸이게 했던 ‘고흐’가 생각이 났다. 내가 본 인물 중에 ‘전혜린’과 더불어 가장 치열하게 인생

을 산 사람이었다. 그것에 더해서,‘김점선’의 자유분방함, ‘오노요코’의 극단적인 열정,‘클림트’의 그림

속 철학 같은 것들이 나를 자극했다. 한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그러나 언젠가 한번은 꼭 하고 싶었던

‘그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방황으로 1년을 보낸 터라 학점이 그리 좋을 리는 없었다. 그 공간을 노력으로 채우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하기에는 버거웠다. 그래서 학원을 찾았다. 편입을 전문으로 하는 미술학원은 거의 없었다. 소

문을 듣고 찾은 한군데의 학원은 최소, 한 시간 반 정도 통학해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겨울방학이 끝나면서 2학년이 되었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일념하나로

시간표를 학원위주로 짰다. 일주일에 3번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되도록 오전수업으로 몰아넣

고 수업이 끝나는 즉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학원에 갔다. 그래도 이틀 정도는 저녁시간

이 다 되서 수업이 마치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은 편의점 우유 한잔으로 저녁을 때우고 10시까지 학원

수업을 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 녹초가 되었다. 왕복 3시간의 거리가 지침과 짜증으로 몰아넣었지만,

나는 로봇 같이 살았다.

재수 실패로 인한 죄책감으로 부모님께 편입을 하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학원비를 벌

기 위해 평일에는 학교 내의 ‘도서관 알바’를 하고 주말에는 ‘호프집 서빙’을 했다. 주말에 밤을 새서 탁

한 공기 속에서 일을 하니, 평일에도 멍한 상태가 지속됐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

을 만큼 시간이 촉박했고,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그 와중에도‘학원은 무조건 빠지지 말자’라는 생각으

로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살아간 것이 아니라,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여름방학이 되었다. 여름방학이 가장 피크였다. 이 시간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승리를 보장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학원에서 가까운 곳으로 자취방을 얻어서 이사

했다. 부모님께 편입을 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말씀드렸지만 ‘미술’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말하기 전에 행동으로 노력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학원에 전념하려면 몸이 조금 편한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또한, 오후2시부터 시작하는 학원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오전에는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복지센터’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웨딩’알

바를 했다. 오전에 일을 하니 규칙적인 생활이 지속됐다. 바쁠수록 마음의 긴장을 늦추지 않겠다는 생

각으로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먹고, 지하철비도 아끼고 체력도 기를 겸 40분정도의

거리를 걸어 다녔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2학기 시간표를 짜야했다. 2학기 때에는 학교보다는 학원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

으로 학원 앞 자취방에서 계속 살고, 학교를 통학하기로 했다. 학교 가는 날짜를 줄이면 학원을 하루라

도 더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내 계획과는 달리 학교의 교묘한 방침으로 시간표를

아무리 짜도 학교를 4일은 가야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2학기 시절에서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몸이 부서질 듯 아프고 힘이 없더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점이었다. 30분 이상을 가야하는 지하철 안에서 무언가 보람찬 일을 해야만 했다. 시험기간에는 학점

을 잘 받기 위한 필사의 노력으로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시험공부에 열을 올렸고, 시험기간이 아니

더라도 생각을 키우고 주관을 갖게 해줄 책을 반드시 읽었다. 덕분에 두통약을 달고 살아야 했고, 무거

운 책을 세 네권씩 들고 다니면서 체력이 약하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12월이 되자 각 대학들에서 편입요강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손꼽아 기다렸던 ‘국민대’는 2명, ‘경원대’

는 3명을 뽑았다. 나는 회화과가 목표였기 때문에 일러스트를 보는 디자인과에도 시험을 볼 수도 있었

지만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행운인지 불행인지, 편입생을 잘 뽑지 않던 ‘부산대’에서

도  인원이 발표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회화과를 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았기에 ‘부산대’에 원서를

넣어 볼 것을 권유하셨다. 나는 조금 망설였다. 준비하지 않았던 영어시험까지 보는데다가, 포트폴리

오를 만드는 것도 굉장히 까다로웠고, 시험에 뭐가 나올지조차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부

터 서울을 목표로 했기에 부산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 실력을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해야할 시기였다. 국민대 포토폴리오와는 별도로 부산대것도 준비하게 되었고, 그것을 준비할 때

까지만 해도 기대에 차 있었다.

기대는 머지않아 절망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더 초조했고 후에는 ‘포기’와 ‘용

기’를 수시로 반복했다. 미완성된 실력으로 시험을 보러갈 용기가 없었다. 그런 중에도 내가 포기하지

않게 해준 것은 ‘재미’였다. 그림 그리는 것이 재미있었다. 기본기가 없는 실력에 아이디어만을 짜내는

그림보다는 뭔가가 이루어진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오래동안 그림을 접해온 사람들보다 내 묘사력이

뛰어날 수는 없었다. 선생님께서도 그걸 느끼고 계셨다. 내 장점을 살리면서 단점을 덮을 수 있을 것

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만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색깔의 조화와 화려함, 전체적인 배경과의 어울림을

강조하고 떨어지는 묘사력을 덜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이때에 선생님의 타고난 직관력과

배경, 구성의 가르침이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불안감은 나를 쉴새없이 채

찍질해댔다. 그렇기에 자신 없었던 ‘영어’였지만 미친 듯이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번 시험에

서 승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유일한 길이었기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탐구하고 파고드는 성향으로 단

순암기식 시험에 적응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무식하게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

혜를 키우는 공부는 평소에 해야 하는 것이라면 단시간에 얻어야 할 것은 지식뿐이었다.

가장 기초적인 단어, 독해문장, 기본적인 문법을 프린트했다. 단 시간에 편입영어점수를 높게 받기 위

해서는 독해를 많이 하라는 말에 독해문장을 해석해봤지만 실력이 향상되는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일

단 문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문법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독해를 하다가 모르는 문법

이 나오면 먼저, 지인에게 전화해서 물어보았다. 그리고도 그 문법에 대해서 책을 찾아보고, 수능 준비

할 때 봤던 문법동영상을 보고, 다시 문장을 해석해 보면서 완벽히 내 것이 되도록 반복했다. 부족한

단어를 보충하기 위해 걸어 다니면서 단어장을 보고 단어를 외우고 주말에는 집에서 하루 종일 노래

부르듯이 단어를 외우기도 했다. 평일에 하루 종일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터라 부족한 시간을 보충

하기 위해, 주말에는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영어공부를 하고, 지겨울 때에는 그림을 조금 그리

다가 다시 영어공부를 하곤 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부산대 1차 시험을 치르고 나니 긴장감이 풀렸다. 그렇지만 부산대랑 시험

일이 겹친 경원대는 포기한다 하더라도, 국민대가 또다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국민대는 부산대보다

더 예측불허의 시험이었다. 주제해석을 다양하게 드로잉하며 독특한 방식으로 준비했다. 그림과 이론

을 병행하면서 갖가지 방법을 응용해서 그렸다. 나는 그 시간들이 굉장히 즐거웠다. 나만의 독창적이

고 개성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좋았고, 미술사를 알게 되고, 그것들을 직접 적용해 보는 것이 즐

거웠다. 이것이 진짜 배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게 되었다. 실제 시험문제는 날 꽤 당황하게 만

들었고, 그림을 그리는 내내 남들과 비슷하지 않다는 점이 날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

가 합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관건은 ‘면접’이었다. 서양미술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모두 갖추어져야 하고, 나

의 주관이 뚜렷해야 했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대답을 얼마만큼 잘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러려면 무의식중에도 대답이 나올 만큼 알

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술사책을 읽으면서 각 시대 화가들의 성장과정과 성격, 화가로서의 삶

등을 보면서 그들을 마음으로 이해하였고, 그러면 그들이 더욱 기억에 남았다. 또한, 면접에 관한 자료

를 한 뭉치나 프린트해서 틈틈이 읽어보았다. 사실 그 중에는 실제 면접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것들에 진실 되게 답하면서 내 주관을 뚜렷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

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면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얼마만큼 주관을 가지고 있고 진실이 느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 시간에 이루어지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약간 엇나가는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산책을 즐겨

하는 편이고, 어딘가를 갈 때에도 걸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먼 곳을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할 때에도 그

상황을 즐기는 편이다. 걸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

다. 누군가가 나의 ‘꿈’이나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등을 물었을 때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한다

면 그건 내 자신의 삶에 대해 아무 애착도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건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시인‘윤동주’도 항상 걸으면서 명상을 즐겼다고 한다. 명상까지는 못하더라도 그 작은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내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지혜로운 삶을 위한 밑거름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면접

에 대한 자신감도 더할 나위 없이 증가할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시작 할 때부터 3년 가까이 내 삶은 침체되어 있었고, 오직 하나의 목표

만을 보고 살아왔다. 그 시간동안 항상 내 자신과 투쟁하면서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방법들을 알아갔

다. 편입은 절망 속에서 포기를 선택하려던 순간에서 나를 이끌어 내 주었고, 크게 성장시켜 주었다. 

나는 단 일년 만에 ‘운 좋게’합격한 사람이 아니다. 이 순간이 있기까지 내 자신과 피 터지게 싸우고 울

고, 주저앉을 뻔한 사람이다. 분명 이번에 ‘운’이 따른 것은 사실이지만, 노력 없는 운은 없다고 생각한

다. 그리고 그 운조차도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결국, 나는 단 두 군데에 원서를 넣었다. 일년 가까이 준비하면서 두 군데 밖에 넣지 않은 것이 불안하

고 아까운 마음도 들었다. 더군다나 두 군데 모두 만만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합격

을 했을 경우를 상상해봤다. 그리고 정말 기뻐할 만한 곳이 아니라면 절대 원서를 넣지 않겠다고 생각

했다. 그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다른 곳에 소진할 노력을 단 두 군데에만 쏟아 부을 수

있었고, 이런 결정을 하는 것도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또한, 나의 실력을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하였

기 때문에, 남들과 다른 전략을 짰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 전형방법을 잘 이용했고, 그

것 역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시기에 나에게 맞는 스승을 만나는 것도 큰 행운중의 하나이다.

후소 엄 선생님의 탁월한 안목과 능력의 도움이 없었다면 분명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일까’하고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에 자신 있게 대답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 노력이 단지
 
98%뿐이었더라도, 나는 2%의 행운으로 인해 가장 행복한 두 글자를 볼 수 있었다.    ‘ 합 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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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미대편입 명문학원 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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